드라마 ‘올인’의 모티브가 된 인물, 한국포커의 개척자 차민수

 

 

대한민국의 프로 포커 플레이어. 과거 드라마 올인의 실제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한국관광공사의 자회사인 그랜드코리아레저의 상임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에 카지노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를 창립해서 회장으로 재직중.

미국식 이름은 지미 차(Jimmy Cha)


상당히 촉망받는 기재였지만 얼마 후 미국으로 이민갔고], 미국에서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지만 카지노와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사업은 다 말아먹고 이혼까지 당한 후 빈털터리로 귀국했는데, 어머니에 의해 거의 쫓겨나다시피 미국으로 돌아가서 아예 본격적으로 프로포커에 뛰어든 것이 인생 역전의 계기가 되었다. 무일푼에서 내기바둑으로 밑천을 간신히 확보하여 다시 카지노행, 카지노 딜러와 재혼하였고 부인의 격려에 힘입어 급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세계적인 수준의 프로 포커 플레이어로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으며, 이민 이후 바둑은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하며 지냈다. 하지만 포커 플레이어로 활동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미국인들에게 바둑을 보급하는 일에 힘썼다. 한국기원은 그 공로를 인정해 계속 初단에 머물러 있던 그를 1984년에 四단으로 특별히 승단시켜줬다. 여담으로 그가 포커에 뛰어든 것은 바둑 애호가이던 아마추어 포커선수에게 바둑을 가르쳐 주는 반대급부로 포커를 배운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왼쪽부터 아들 에디 차, 정찬성 선수, 드라마 ‘올인’ 배우 이병헌과 함께.

차민수의 경력에 대한 여러 말들이 오고간적이 있는데 일단 대회 기록상으로는 세간에 알려진 정도로 엄청난 프로갬블러는 아니다. 다만 차민수의 포커 커리어는 토너먼트 게임보다는 캐시 게임에 집중되어 있다.

차민수 본인도 자신이 토너먼트 게임보다는 캐쉬게임을 훨씬 많이 했음을 언급하기도 했다. 포커에 손을 대게 된 계기가 돈을 벌기 위함이었기에 당시 크지 않은 상금을 위한 대회도전보다는 당장 거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캐쉬게임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대회기록을 통해 차민수의 포커 경력이나 실력을 따진다는 것은 어느정도 한계점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어쨌거나 남아있는 기록이 거의 없으니 저평가당하는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세계에서 인정하는 토너먼트들을 여러 번 우승하고 세계랭킹 6위까지 올라가 보고 1999년도에는 월드 포커상금랭킹 2위까지 올라본 한국계 선수 중 가장 유명한 토너먼트 포커 게임 선수 케빈 송도 차민수의 대한 포커 실력 질문이 나올때마다 실력을 높게 쳐주고 차민수를 존경한다고 표현했다.

결론은 차민수는 거의 완전한 캐쉬게임 플레이어였으며 캐쉬게임 특성상 기록은 거의 남지 않기 때문에 현재 차민수의 커리어가 과소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가 대단한 플레이어였다는건 사실이며 1980~1990년대를 풍미한 정상급 플레이어였다.

그러나 토너먼트로는 그러지 못(혹은 토너먼트가 본인이 하는 캐시게임보다 상금이 작아서 굳이 많이 참여를 안)했고, 그렇지만 한국에서는 캐쉬게임 레전드라고 하면 대중들이 이해를 못하니, 적당히 포커 챔피언 이런 식으로 소개를 하다보니 막상 기록만 봤을때는 토너먼트 기록은 별로 대단한 게 없어서 저평가된 편이 강하다.

WSOP의 성적은 좋지만은 않다만 나쁜 성적도 아니다. 여러번 출전해서 33회(13위), 34회(8위-5위-7위-27위), 37회(24위-38위)를 하였다. 참고로 대회 참가자는 평균적으로 200명이니 상당한 상위권이다. 하지만 세계랭커라고 하긴 뭐한 것이, 일반적으로 WSOP라 하면 메인이벤트, 즉 입장금 $10,000에 상금만 $8M 이상 하는 메인이벤트를 일컫는데, 메인이벤트서 입상한 경력은 없다. 그리고, PokerDB에 따르면 미국 내 랭킹이 2천위 밖이며, 세계로 따지면 4천위에 육박한다. 토너먼트 상금이 $320K, 대략 3억2천만 원 정도 된다고 하면 그리 독보적인 경력이라 할 순 없다. 참고로 한국의 상금순위는 전체 53위다. 이마저도 아주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 중.

다만 여기에도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있는데, 첫 번째로 당시 포커씬의 경우 토너먼트 상금풀이 지금처럼 크지 않아 많은 수의 플레이어들이 활동하던 무대는 아니었다. 애초에 포커 자체가 2003년 wsop에서 아마추어 플레이어인 Chris Moneymaker이 우승하기 전까지는 아마추어는 별로 없고 프로 선수들 위주로 돌아가는 크지도, 대중적이지도 않은 마이너한 종목이였다. 현재도 절대 다수의 포커 플레이어들은 토너먼트 포커와 캐시 포커를 전혀 다른 게임이라 여기고 접근하고 있으며, 당장에 유튜브 동영상 몇 개만 보더라도 최고의 토너 플레이어들이 캐쉬 게임에서 죽을 쑤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지금은 가장 권위있는 대회가 WSOP, WPT, EPT등이 있지만 당시에는 WSOP 다음의 권위를 가지는 투어는 앞서 이야기한 SBOP였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토너먼트 플레이어로 여겨지며 WSOP main event에서 3번 우승한 스튜어트 에럴 엉거(Stuart Errol Ungar)의 경우에도 최고로 인정받는 이유들 중 하나가 SBOP main event 3회 우승이다.

당시에도 WSOP main event의 우승자에 한해 그 해의 월드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의미는 하나의 명예에 가까웠고 이 타이틀 만으로 플레이어의 실력을 판단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면 이 대회에서 2회 연속 우승자였으며 현재 살아있는 레전드, 포커의 대부라 불리는 도일 브런슨의 경우 가장 위대한 플레이어로 데이비드 칩 리스를 항상 1순위로 꼽는다. 하지만 칩 리스는 WSOP내 3개의 이벤트를 우승했으나 main event에서는 단 한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브론스외의 다른 수많은 최고의 플레이어, 심지어는 차민수조차 칩 리즈를 세계 포커 게임 지존이며 역대 최고의 실력으로 평가한다. 현존하는 최강의 포커 플레이어라 여겨지는 필 아이비 역시 칩 리즈를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은 바 있는데, 재밌는 것은 필 아이비 자신 역시 월드 포커 메인 이벤트 우승은 단 한번도 없지만 수많은 포커 토너먼트 우승자들은 필 아이비를 현존 세계최강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정리하자면, 차민수는 대회 수상 실적은 많지 않지만 캐쉬게임 등 각종 비공식전에서 거둔 대단한 전적으로 당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진, 충분히 실력을 인정받는 플레이어였다. 이 때문에 한국 역사상 최고의 포커 플레이어중 하나로, 그리고 한국 포커의 개척자로 널리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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